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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경주기행》을 보기 전까지 제목이 그냥 경주 여행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내딸을 잃은 네 모녀가 살인범을 트렁크에 싣고 경주로 떠난다는 내용을 알고 나서야 "아, 이건 좀 다른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고, 결국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가족여행이라는 포장지 속에 담긴 것

영화는 한국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3등 수상작이자 부산국제영화제 라이징 필름즈 어워즈 최종 선정작입니다. 여기서 '라이징 필름즈 어워즈'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의 차기작을 발굴·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선정만 돼도 업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습니다. 10억 원의 투자를 받은 여성 감독의 여성 서사 영화라는 점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습니다.

줄거리를 짧게 짚으면 이렇습니다. 이옥실(이정은)은 남편과 네 딸과 함께 가난하지만 평범하게 살다가 막내딸 경주를 수학여행 중 잃습니다. 살인범은 붙잡혔지만 법원은 고작 15년 형을 선고했고,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법원 앞에서 투신합니다. 집안이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그로부터 8년 뒤, 엄마는 합의서를 써줘 살인범을 일찍 출소시키고, 둘째 딸이 치밀하게 납치 계획을 세워 살인범을 트렁크에 태운 채 가족 여행을 떠납니다. 가족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경주로 향하는 장면은 블랙 코미디적 장치입니다. 여기서 '블랙 코미디'란 죽음이나 범죄처럼 어두운 소재를 유머로 비틀어 표현하는 장르 기법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설정 자체는 꽤 강렬했다는 겁니다. 가족 여행이라는 익숙하고 평화로운 포맷 안에 복수라는 무거운 목적을 숨겨놓은 구조가 초반에는 분명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이라는 배우진도 기대감을 높였고요.

  • 막내딸 피살 → 아버지 투신 → 8년 후 복수 여행이라는 3단 구조
  • 부산국제영화제 라이징 필름즈 어워즈 최종 선정, 10억 원 투자 유치
  • 이정은·공효진·박소담·이연의 모녀 4인 캐스팅
요약: 강렬한 설정과 탄탄한 캐스팅으로 시작한 《경주기행》은, 출발선만큼은 분명히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복수극이 스스로 발목을 잡은 이유

제 경험상 복수극 장르가 관객을 몰입시키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합니다. 첫째는 도덕적 딜레마, 즉 "직접 살인하면 나도 살인자가 된다"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현실적 실행 가능성,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아온 가족이 정말 사람을 칼로 찌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두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면, 아무리 설정이 좋아도 이야기가 허공을 맴돌게 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8년을 준비한 계획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행동이 너무 어설펐습니다. 엄마는 살인범이 한 번 탈출한 전례가 있는데도 생일상을 먼저 차려야 한다며 자리를 비웁니다. 첫째 딸은 아무도 몰래 살인범의 결박을 풀어줬다가 오히려 가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둘째 딸은 8년 동안 법을 공부했다는 캐릭터인데, 범행 계획서를 종이에 프린트해서 서류철로 만들어 보관합니다. 이건 스스로 증거를 만드는 행동입니다.

'내러티브 사보타주(narrative sabotag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해 주인공을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게 설정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캐릭터를 일부러 멍청하게 만들어 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경주기행》에서 가족들의 실수는 이 패턴을 그대로 따릅니다. 살인범이 탈출하고 무고한 식당 아주머니와 경찰 두 명이 추가로 희생되는 장면은, 가족에게 도덕적 면제부를 주기 위해 설계된 구조처럼 보였습니다.

감독이 원한 것은 복수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도 가족들에게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결말이었을 겁니다. 그 딜레마를 풀려고 고른 방법이 "살인범 탈출 → 재차 살인 → 가족이 재처리"라는 시나리오인데, 이 과정에서 캐릭터들의 설득력이 무너집니다. 복수극과 가족극이 서로를 발목 잡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비교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 씨》(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자는 12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복수를 준비합니다. 인간적인 흔들림은 있어도, 해야 할 일을 포기하거나 남에게 떠넘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금자의 행동에 면제부를 주지 않습니다. 복수가 끝난 뒤에도 그 행위가 옳았는지를 관객에게 묻습니다. 이 차이가 두 영화를 완전히 다른 결과물로 만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약: 캐릭터를 인위적으로 무능하게 만들어 위기를 생성하는 방식이 복수극의 몰입을 깨고, 결국 복수극도 가족극도 어느 쪽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복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끼리 서로 쌓인 것들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한 채 계속 부딪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막내를 잃은 슬픔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품고 살아온 네 모녀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여행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감정적 의도 자체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칭찬할 만합니다. 이정은이 보여주는 엄마의 무게감, 박소담이 표현하는 냉정한 둘째의 이면, 이연이 맡은 몸으로 부딪히는 셋째의 존재감 모두 영화의 아쉬운 부분을 어느 정도 메워줍니다. 제 경우엔 배우들의 호흡 덕분에 답답한 장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르 혼종(genre hybridization)'이라는 개념을 여기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장르 혼종이란 복수극·블랙 코미디·가족 드라마처럼 서로 다른 장르를 하나의 영화 안에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이 성공하려면 각 장르의 규칙이 서로를 강화해야 합니다. 《경주기행》에서는 블랙 코미디의 웃음기가 복수의 감정선을 흐리고, 복수극의 긴장감이 가족극의 울림을 약화시킵니다. 두 방향이 서로를 잡아당기다가 결국 둘 다 흐릿해진 셈입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여성 감독의 상업영화 비율은 여전히 전체의 10% 내외에 머물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 그래서 저도 이 영화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 바람이 컸던 만큼 아쉬움도 더 크게 남았습니다. 여성 감독과 배우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영화를 응원하는 마음과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주기행》은 복수의 통쾌함을 기대하고 보면 분명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면 가족 사이의 상실과 균열을 중심으로 본다면 기억에 남는 장면도 분명 있습니다. 어느 쪽을 원하는지 미리 알고 보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저는 봅니다.

요약: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장르 혼종의 실패로 복수극도 가족극도 절반씩 희생됐고, 기대치를 조정하고 보는 것이 이 영화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경주기행은 블랙 코미디 영화인가요, 복수극인가요?

A.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둘 다 표방하면서 둘 다 완전히 되지는 못한 영화라는 겁니다. 블랙 코미디처럼 웃음기 있는 장면이 간간이 나오지만, 복수라는 감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잘 터지지 않습니다. 복수극으로 보기엔 긴장감이 중간에 자주 풀립니다. 장르를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Q. 경주기행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복수에 성공하나요?

A. 스포일러가 포함되니 주의하세요. 살인범이 한 차례 탈출하고 추가 피해자가 생긴 뒤 가족이 다시 상황을 수습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복수 자체는 완성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실수와 내부 갈등이 결말의 감정적 무게를 상당히 분산시킵니다.

 

Q. 친절한 금자씨와 경주기행, 어떤 점이 다른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에게 '면제부'를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는 복수 후에도 그 행위가 옳았는지를 관객에게 계속 묻습니다. 반면 《경주기행》은 가족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남기기 위해 살인범을 일부러 탈출시키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드는 방식을 씁니다. 그 선택이 복수극의 설득력을 약하게 만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Q. 배우들 연기는 볼 만한가요?

A. 이 부분은 확실히 좋았습니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네 사람이 각자의 캐릭터를 잘 살려서, 제 경우엔 이야기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배우들의 호흡 덕에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시나리오보다 배우들이 더 잘한 영화라는 인상이 남았습니다.

 

결론

《경주기행》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이 "아깝다"였습니다. 설정도 강렬하고, 배우도 좋고, 여성 감독이 여성 서사를 다뤘다는 의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복수극과 가족극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면서, 그 잠재력이 절반 이상 흩어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감독이 캐릭터들을 너무 보호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복수를 완성하면서도 가족들을 도덕적으로 결백하게 남기고 싶었던 그 욕심이, 오히려 이야기의 날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 씨》에서 보여준 것처럼, 복수극은 주인공의 행위에 끝까지 질문을 던질 때 더 강해집니다. 《경주기행》을 본 뒤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궁금하다면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해서 보는 것을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uQuS078n7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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